환글에 글말과 말글이 있었다

‘글 글(契)’이 있었다.
글(契)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글의 발전사를 요약해 본다.

▨ 갑골문(은글) 앞에도 글이 있었다

보통 은나라의 글이었던 갑골문(殷契)부터 역사시대, 또 문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갑골문 이전에도 문자의 시작으로 볼 수 있는 단서들은 많이 있다.

한문학자 진태하는 도부(陶符)에서 문자의 시작을 찾는다.

”중국 서안의 반파(半坡) 유적지 (모계 씨족사회, 채색 되기 등의 특징을 가진 앙소/仰紹문명)에서 발견된 도부(陶符) 같은 것을 문자로 본다면 문자의 시작은 6천 년 전으로 올라간다.“ (진태하, ”한자는 우리의 조상 동이족이 만들었다“ 참조)

갑골문 연구자 양동숙은 문자의 시작을 더 앞당긴다.

”약 1만 년 전 문자 태동의 흔적이 보이고, 7천여 년 전 조금씩 조금씩 형태를 이루며 여러 곳에서 초보적인 문자부호가 사용되었다. 그러다 3,300여 년 전인 상대에 와서 문장형식을 갖추고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로 완결되었다.“ (양동숙, ”한자 속의 중국 신화와 역사 이야기“ 참조)

상 나라의 갑골문 이전에도 의미 있는 부호들이 있었고, 이를 문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문자의 시작이 되는‘의미 있는 부호들’은 여러 종류가 있다.

1) 바위에 새겨진 그림보다 단순화된 부호(암각 도형 岩刻圖形)
2) 도자기에 새겨진 그림(陶象, 읽을 수 있는 그림)
3) 도자기에 새겨진 부호(도부陶符, 선線으로 된 의미 있는 부호)
4) 도기나 청동기에 새겨진 씨족 토템용 족휘(族徽). 특히 원시 금문 즉 오제 시대의 금문(五帝金文)은 이름글자(名文)로, 갑골문보다 1천 년 앞섰다.

이런 의미 있는 부호들은 ‘그림에서 문자로 변해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원시(古) 글(契)이다.

북한의 학자들은 조선 땅에도 ‘그림글자’(회화문자, 예 : 울산 암각화), ‘모양 본뜬 글자’(상형문자, 예 : 남해 석각), ‘부호글자’ (도부나 금문 등) 등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김인호, ”조선 인민의 글자생활사“ 참조)

발해연안문명권 : 이형구, "발해연안문명" 인용
발해연안문명권 : 이형구, "발해연안문명" 인용

 

이종호,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 인용

특히 주목할 것은 최근 홍산 문명의 소하연(小河沿) 유적(BC3000~2000)에서 5천 년 전의 문자부호가 발견된 것이다. 역사학자 심백강은 소하연의 도화 문자가 상대의 갑골문으로 이어졌다고 보며, 창힐의 활동 시기와 겹치는 점에 주목한다. (심백강, “한국 상고사 환국” 참조)

소하연 유적의 도화 문자.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인용

 

▨ 은글(殷契)은 설(契) 부족의 점복(占卜) 문화였다

갑골문자(은글殷契)는 상(商) 왕조(후기에 은殷으로 국명변경, BC1600~BC1046)의 글자들을 말한다.

갑골문자는 주로 은나라 수도였던 중국 하남성 은허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갑골문은 발해 연안을 중심으로 갑골 문화를 가진 동이족이 주로 활동하던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이형구,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참조)

2004년 그림문자와 갑골문의 중간 단계이며, 동이족이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골각문(骨角契)이 발견되었다.

골각문(骨角文)은 갑골문보다 1천 년 앞선 글자이다. 짐승 뼈에 새겼고, 산동 지방의 용산 문명 유적이다. 치우 황제 요 순 우 설이 활동하던 시대이다. (산동대고고미술학연구소 劉鳳君 소장, 논문 ”동이문자 산동골각문 발견“ 등 참조)

남해 석각(경남 남해군 양아리 거북바위)은 갑골문보다 1천년 앞선 시대 고조선 초기에 새긴 초기 전서체로 풀이되고 있다. (문치웅, ”고조선 고각 남해석각 해석 “/동아시아고대학 18집)

2023.7 촬영, 남해 거북바위 석각
(문치웅, ”고조선 고각 남해석각 해석 “/동아시아고대학 18집 인용)
(문치웅, ”고조선 고각 남해석각 해석 “/동아시아고대학 18집 인용)

2018년에는 경남 하동 지리산 삼신봉에서 갑골문과 유사한 글자가 새겨진 암석이 발견되었다.

신유승 채자 지리산 삼신봉 원시문자. 이찬구, ”고조선의 오행과 역법 연구“ 인용

‘골각문/갑골문’은 동이족 갑골점복(甲骨占卜) 문화의 산물이다.

설(契, 偰, 卨)이라는 사람은 상商(=은殷) 나라의 시조이다. 사마천 사기의‘은본기’에 ”契長而佐禹治水有功“이라는 기록이 있다. ‘동이인인 설은 순(舜)임금 시절 우(禹)를 도와 치수(治水)의 공을 세웠고, 사도(지금의 문교부 장관)를 지냈다’라는 설명이다.

상 족의 시조인 설(契, 시에)은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인 부우씨(夫虞氏, 제준帝俊)의 손자이다. 순을 이어받은 우가 하나라를 세웠고, 설은 부우씨로부터 박(亳뽀/지금의 하남성) 땅을 봉지로 받아 상(商)족의 시조가 되었다. 설의 후손인 탕(湯)이 상(商) 나라를 세웠다. (박문기, ”정음선생“ 참조)

사람이름‘설(契)’은 상 나라의 시조인 ‘설’ 때문에 생긴 훈과 음이 분명하다.

설의 후예들인 상(商)족이 점복문화에‘글’을 사용했다.

역사학자 윤내현은 갑골점복을 상징하는 것이 ‘글(契)’이고, 이런 문화를 만든 사람이 ‘설(契)’이라 분석한다. 글과 설이 한자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윤내현, ”상주사(商周史) “ 인용

‘인류사회는 무리(群,Band), 부족(部族,Tribe), 추방(酋邦,마을연맹체,Chiefdom), 국가의(State) 단계’로 발전해왔고, 하(夏,시아)는 추방 단계에 있었고 상(商,상)이 아시아적 특징을 지닌 고대국가로 발전했다.
고문자인 갑골문이 상의 후기에 주로 생산되었으니, 상의 후기는 명백히 문자를 가진 국가단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상의 초기는 추방사회의 말기단계이고, 상은 중기 이전에 고대국가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상 족의 시조는 설(契,시에)이지만, 설의 14대 후손인 대을(大乙,따이, 湯왕)에서야 드디어 상 왕조가 세워졌다.
갑골점복(甲骨占卜)은 상(商) 족에게 가장 중요시한 행사였다.
갑골점복은 신앙과 사상의 통일에 기여하였고, 상 족이 하(夏,시아) 족을 이기고 상 왕조를 건립하는 데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  (윤내현, ”상주사(商周史) “ 인용)

그리하여 윤내현은 ‘갑골점복의 방법을 창안해냈거나 널리 보급한 상(商) 족의 부족장’이 갑골점복을 상징하는 ‘설(契,시에)’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짓는다.

처음에는 글, 설이 모두 같은 한자였다.
이후 각각의 사안을 분리하기 위하여 다양한 파생 글자들이 만들어졌다.

설(偰, 사람이름 설),계(禊, 푸닥거리 계), 끽(喫, 먹을 끽), 계(鍥 새길 계, 글로도 읽고, 우리가 나무 다듬을 때 쓰는 ’끌‘의 한자) 등.

▨ 청제靑帝 창힐은 배달국 신지문자를 정리하여 중원에 전했다

중국에서는 창힐(倉頡, 蒼頡)이 한자와 육서(六書)를 만들었다는 사화(史話)가 있다.설(契)을 창힐(倉頡, 蒼頡)과 동일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창힐은 황제 헌원(BC2716~BC2598, 즉위 BC2697 추정) 시절의 좌사(左史, =사관, 글씨 쓰는 사람)이며, 조족문(鳥足文)과 과두문(蝌蚪文, 올챙이 글자)을 만들었다고 전해 온다.
설이 도왔다는 우(禹, BC2123~BC2025 추정)는 하(夏) 나라(BC2070~BC1600)를 세웠다.

설과 창힐의 생몰 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창힐과 설을 동일인물로 보기에는 시차가 너무 많다. 활동 시대가 다른 설과 창힐이 동일인물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고, 글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뒤섞여 전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설과 창힐에 관한 사화, 갑골문을 중심으로 한 글의 발전사는 한자(漢字)의 발전을 기준으로 해설한 것이다.

이를 다시 한글의 발전을 기준으로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해 보자.

윤내현이 정리한 한국 고대사의 발전 단계다.

윤내현, ”한국 고대사“ 참조

한국사의 환웅과 곰녀의 결혼 시대 즉 ’마을연맹체사회‘는 중국사의 앙소문명 단계(도부陶附 글)이고, 단군 시대는 중국사의 용산문명 시기(골각骨角 글)와 겹친다.

창힐의 고향인 섬서성 백수현에는 창힐이 만들었다는 글자들을 새긴 ‘창성조적서비(倉聖鳥跡書碑)’가 있다. 서비에 새겨진 글자는 환웅의 배달국부터 내려온다는‘신지 문자(神誌 文字, 19C 중엽 제작된 평안도 영변부 읍지인 영변지寧邊誌 등에 나오는 신지전자)’와 유사하다.

사회학자 신용하는 ”고조선에는 신지문자라는 문자가 창제되어 실재했었다. 고중국에서는 고조선의 신지문자를 ‘창힐(蒼頡)문자’라고 일컫기도 하였다.”라며, 창힐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지문자와 창힐문자가 같은 이유는 신지문자가 고중국에 전수된 것이 창힐문자이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 근거는 우선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포박자(抱朴子)’에 고중국의 황제가 조선에 간 적이 있을 때 고조선의 학자 ‘자부’ 선생으로부터 고조선 문자(신지문자)를 받아왔다고 풀이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蒼힐’은 ‘푸른나라 사람 힐’의 뜻으로 그 자체 ‘靑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힐’은 사관 이름이며 ‘蒼’은 ‘靑丘’(조선)를 의미한다. 창힐문자란 ‘고조선 사관 힐’에서 받아온 문자의 뜻이 된다. “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참조)

신지문자와 창힐문자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환단고기의 기록도 도움 된다.

”涿之北有大撓東有倉頡西有軒轅“ (탁록의 북쪽에 대요, 동쪽에 창힐, 서쪽에 헌원이 자리잡고) ”大撓嘗學干支之術 倉頡受符圖之文“(대요는 일찍이 배달로부터 육십갑자의 간지의 술법을 배웠고, 창힐은 부같고 그림 같은 모습을 한 글자(符圖之文)를 전수받았다)<환단고기_삼성기전(하)>

”共工軒轅倉頡大撓之徒皆來學焉“ (공공 헌원 창힐 대요의 무리가 찾아와서 모두 (자부선생에게) 배웠다) <환단고기_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마한세가(상)>

환단고기에 따르면, 창힐은 황제훤원과 동시대의 인물이며 치우천황의 제후이다. 그리고 치우천황이 다스리던 배달국 신지문자를 자부선생에게 배워간 인물로 해석된다.

치우천황은 환웅천왕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 (倍達國)의 제14대 천황이고,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다는 자오지 (慈烏支) 환웅이다. (환단고기_삼성기 참조)

”치우천황의 청구시대에 화서를 쓰고 있었으며, 당시 자부선인은 우서를 만들었다. 동쪽 지역을 다스리던 청제 창힐은 조족문과 과두문을 창안하였다. 황제 훤원은 정식으로 유웅국의 왕이 되어 황제로 봉해진 후 청제 창힐을 초빙하여 문자를 전수받아 자신의 나라 안에 통용시켰다.”(조홍근, “마고할미로부터 7만년” 참조)

환단고기의 기록에 대한 재야사학자 조홍근의 해석이 중국의 기록과 환단고기의 기록을 연결해 준다.

▨ 배달나라 신지문자가 고조선의 신전이 된다, 글말은 신전으로 말글은 가림토로

환인, 환웅, 환검(단군)의 역사를 기준으로 글의 발전사를 다시 정리해보면.

배달나라의 초대 환웅 시대에 녹도문(鹿圖文)이 있었다.

”桓雄天潢又復命神誌赫德作書契“ (환웅 천황께서 또다시 신지 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다) <이맥, ‘환단고기_태백일사 신시본기’인용>

당시 신지는 왕명을 주관하는 관명으로서 대대로 사관의 직책을 맡았다. 신지 혁덕이 처음 만든 문자는 녹도문(鹿圖文)이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이 세워지기 약 1500년 전(BC3898)이다. (북애, ‘규원사화’ 참조)

배달나라에서는 녹도문을 발전시킨 우서 화서 산목 용서가 있었고, 이것이 고조선의 신전(神篆)으로 발전했다.

”世傳神市 有鹿書 紫府有雨書 蚩尤有花書 鬪佃文束 卽其殘痕也 伏羲有龍書 檀君有神篆 此等字書 遍用於白山黑水靑丘九黎之域“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시 시대에 녹서가 있었고, 자부 선생 때 우서가 있었고, 치우천황 때 화서가 있었다고 했는데, 투전문 등은 바로 그것이 오늘날 남아있는 흔적이다. 복희 때 용서가 있었고 단군 때 신전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자가 백두산, 흑룡강, 청구, 구려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맥, ”환단고기_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녹서(鹿書,녹도문)는 사슴 발자국을 본떠 만들었다는 그림문자이다. (BC3800년 경)
우서(雨書)는 자부紫府가 녹도문을 개량하여 비의 형상을 본떠 만든 세로형 선(線)형 문자로 기호문자로 전환되었다. (BC3800년 경일까 BC2700년 경일까?)
용서(龍書)는 복희가 만든 가로형 선형 문자로, 역(易)으로 발전했다. (BC3500년경)
화서(花書)는 치우 때의 화려한 체로 투전 패에 그려진 글자이다. (BC2700년경)

이 모두가 배달나라의 신지(神志)문자이다. 신지는 하늘(황제)의 뜻을 전하는 관직명이다.

그림에서 문자로, 세로에서 가로로 발전하는 문자의 원리(수메르 문자도 그렇게 발전했다)에 따르면 ‘녹서-> 우서-> 용서-> 화서->신전’의 순이 맞다. 그래서 우서를 BC3800년 경으로 추론할 수 있다.

언어학자 정연규와 문화사 연구자 김동춘은 그 발전과정을 정리한 표이다.

정연규, ”대한상고사”와 김동춘, ”천부경과 단군사화“ 참조
정연규, ”대한상고사”와 김동춘, ”천부경과 단군사화“ 참조

그런데 환단고기의 기록이나 포박자의 기록에 따르면 우서를 만들었다는 자부선인은 치우천황 때 사람이다. 즉 BC3800년 경이 아니라 BC2700년 경이 된다. 그러면 신지문자의 ‘순서는 녹도문 -> 용서 -> 우서/화서 -> 신전’ 순이 된다.

우서의 시기가 두 가지로 알려진 것은 더 자세히 살펴볼 부분이다.

결국, 창힐의 활동 시대는 녹서, 우서, 화서, 용서라는 신지문자가 있었던 시기이다. 창힐은 이러한 문자들을 자신의 방식으로 정리하여 중원으로 전한 것이 된다.

신지문자의 처음은‘녹도문’이다.

손글씨 작가 나종혁은 신지문자의 유적들(평양 법수교비 문자, 서법진결, 순화각첩, 창성조적서비, 누루하치비, 안경전의 환단고기 등에 나오는 신지문자)을 하나로 모은 44자를 ‘녹도문자’라며 그려냈다.

나종혁, ”나종혁 작품집8_가림토 캘리그라피“ 인용
나종혁, ”나종혁 작품집8_가림토 캘리그라피“ 인용

많은 책에서 배달나라 초기의 녹도문을 나종혁이 그린 글씨(창힐의 창성조적서비의 글씨) 같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이 글자를 수록한 영변지에서는 ‘신지전자(神志篆字)’라 적혀 있다. 영변지의 16자를 이현숙 (이현숙, ”천부경 하나부터 열까지“)과 구길수(구길수, ”진본 천부경“)는 녹도문으로 적은 천부경이라며, 그 해석을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16자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현숙, ”천부경 하나부터 열까지“ 인용
이현숙, ”천부경 하나부터 열까지“ 인용

하지만, 녹도문에서 1100년이 지나 창힐이 중원으로 문자를 전했다. 당시 배달국에는 녹서, 산목, 우서, 용서, 화서 등이 있었다.

또한 녹도문은 이름에서부터 그림글자이다. 하지만, 나종혁이 정리한 녹도문자는 그림글자라고 보기에는 매우 발전한 문자 모양이다.

과연 창힐문자로 알려진 신지전자가 녹도문일까?

북조선의 언어학자들은 신지문자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한다.

”신지글자는 이미 신석기 시대로부터 리용하여온 시초적인 유치한 글자형태들을 계승 발전시켜 만든 글자였다. 신지글자는 그 수가 매우 적고 도형들이 자연적인 대상들을 거의 그대로 나타내던 원시적인 형태로부터 훨씬 벗어난 것들이며 부호적인 표식, 불균형적인 도형들도 얼마 없다. 
이것은 보다 전진한 단계의 글자로서 당시의 글자 생활을 보장한 수준 있는 글자였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며, 그 계승 관계를 3단계로 파악했다. (김인호, ”조선 인민의 글자생활사“ 참조)

신지글자 형태의 완성 과정 : ”조선 인민의 글자생활사“ 인용
신지글자 형태의 완성 과정 : ”조선 인민의 글자생활사“ 인용

김인호가 분석한 신지글자의 3단계에 이르러서야 창힐의 글자와 유사해진다.
그렇다면 녹도문은 신지글자의 1단계(그림글자 수준)나 2단계가 아닐까?

한국의 재야 한글학자들이 대부분 녹도문과 창힐글자, 신지전자를 거의 같이 보고 있는 현실에서 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 일이다.

신지문자는 창힐을 거쳐 골각문과 갑골문으로 발전했다.

골각문 단계에 이르자 ‘설(契)’이 등장한다. 당시 고조선에는 신지문자가 최종적으로‘신전(神篆)’이라는 글자로 정리되어 있었다. 단군의 신전은 녹도문에서 발전해 온 신지글자의 종점이다.

갑골문에서는 신지문자의 3단계와 유사한 글자들을 찾을 수 있다.

녹도문은 신지전자이다. 정연종,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인용
녹도문은 신지전자이다. 정연종,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 인용

고조선의 신지전자와 갑골문 사이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단서로 중국 보정에서 찾은 원시 문자도 있다.

이찬구, ”고조선의 오행과 역법 연구“ 참조
이찬구, ”고조선의 오행과 역법 연구“ 참조

창힐이 배달시대 신지문자(神志文字)의 전파자라면, 설은 고조선 단군 시대 신전(神篆)의 전파자’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단군 시대 신전은 어떤 글자일까?

전(篆)은 대나무(竹)와 단(彖 판단할 단이지만 점占의 뜻도 있다)을 합한 글자이고, 글씨체의 하나이며 ‘죽간에 쓴 글’의 뜻이 있다. 금석문이나 전각문(비석 등)에 주로 사용된 글씨체이다.

한자(漢字)의 발전 단계에서는 주(周, BC1046~BC256 : 大篆)와 진(秦, BC900~BC206 : 小篆) 나라의 글자가 전서(篆書)이다.

신용하가 수집 정리한 표에 나타난 글자들이 고조선의 신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인용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인용

전서와 단군 신전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단군 때 신전(神篆)이 있었는데, 이러한 문자가 백두산, 흑룡강, 청구, 구려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부여 사람 왕문이 처음으로 전서(篆書)가 복잡하다 하여 그 획수를 약간 줄여 부예(符隷)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진나라 때 정막이 사신으로 숙신에 왔다가 한수에서 왕문의 예서 필법을 얻어 그 획을 조금 변형시켰는데, 이것이 지금의 팔분체(예서와 전서의 절충)이다. 진나라 때 왕차중이 해서를 만들었는데, 차중은 왕문의 먼 후손이다. 이제 그 글자의 내력을 고찰해 보면 모두 배달 신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법이다. 지금의 한자도 역시 그 한 갈래를 계승한 것이 분명하다.“ (이맥, ”환단고기 태백일사 _ 소도경전본훈“ 인용)

태백일사의 기록에 따르면, 신지문자의 발전과정에서 신전(神篆)이 있었고 이 신전을 간추려 부예(符隷)를 만들었으며, 이 부예를 기초로 진나라의 전서(篆書)가 만들어졌다. 또한 부여족(원시부여)의 왕문은 말글(文言)을 글말(諺文)로 활용하는 이두법(吏讀法)도 만들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단군의 신전(篆書)에서 한자(漢字)의 전서(篆書)가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단군의 신전이 사용되던 시기와 골각문/갑골문이 사용되던 시기가 겹친다.

▨ 뜻글자 진서(眞書)와 더불어 소리글자도 있었다

배달국의 신지문자는 단군 고조선에서‘신전(神篆)’이라는 신지문자가 되었다.

이것이 眞書였다. 진서는 한자가 아니라 뜻글자(글말)라는 뜻이다.

갑골문에서 참眞은 점치는 청동화로 위에 숟가락을 얻은 모양을 그렸다. 즉 점괘는 진실만을 말해 준다는 뜻이 담겨있다. 이렇게 보면 진서란 점치는 글이 된다.

”(3세 단군 가륵) 재위 2년 경자(BC2181)년, 이때 풍속이 일치하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달랐다. 비록 상형(象形) 표의(表意) 문자인 진서(眞書)가 있어도 열 가구 정도 모인 마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땅이 백리가 되는 나라에서는 서로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가륵 단군께셔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시어, ‘정음 38자’를 짓게 하시니, 이것이 가림토이다. “ (이암, ”환단고기 단군세기“ 인용)

진서는 표의문자 즉 ‘뜻글자’이다. 배달나라에서부터 고조선까지 뜻글자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지만, 통일성이 없었기에 ‘소리글자’정음인 가림토(加臨土)를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신지글자를 인정하는 북한에서는 ”신지글자는 뜻글자까지의 단계를 넘어선 글자이고 소리글자이면서도 수와 형태가 퍽 정리된 글자였다.”라며 신지글자가 소리글자이기도 하다고 분석한다. (김인호, ”조선 인민의 글자생활사“ 참조)

단군 신전과 가림토 모두를 ‘신지글자’로 본다는 시각이다.

가림토(고조선의 소리글자)의 진위를 놓고는 논란이 극심하다.

가림토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문자 유물이 가끔 나오고는 있지만, 가림토의 실체를 입증하기에는 부족하다. 하지만, 연구해 볼 가치가 있고 점점 더 실체에 가까워지고 있다.

가림토의 실체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환글, 한글’에서 다뤄보자.

갑골문이 한자로 발전하고, 그 한자를 고조선 이후에 적용하면서 배달 고조선의 신지문자인 신전(뜻글자)과 가림토 문자(소리글자)는 그 소멸을 시작했다. 하지만, 훈민정음이 생길 때까지 미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고 한다.

”고조선의 신지문자는 BC 108년 고조선 국가가 한 무제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한문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옴에 따라 급속히 소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려 시대까지는 일부 수공업자 계급 사이에서 남아 있었던 흔적이 보인다.“
( 신용하, ”고조선 문명의 사회사“ 참조)

고유글자인 신지글자는 세나라(삼국) 시기부터 기본적인 서사 수단으로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극히 부분적으로만 쓰였다. 이 글자는 국가적인 문서들이나 역사기록들에서는 쓰이지 못하고 주로 평범한 인민들 속에서 부분적으로 쓰이게 되었다. 이런 신지글자가 고려 시기, 조선 초기까지 일부 사람들 속에 일정하게 알려져 있었다. (김인호, ”조선 인민의 글자생활사“ 참조)

재야학자 김동춘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쳐 발전해 온 우리의 고문자들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게 그림으로 그렸다. 뜻글자 흐름으로 ‘신전’, 소리글자 흐름으로 ‘원시 신전’으로 분류한 것에 주목하자.

하지만, 그림 사이사이 메꾸어야 할 틈이 많은 것도 현실이다.

김동춘, ”천부경과 단군사화“ 인용
김동춘, ”천부경과 단군사화“ 인용

이 그림에 나타난 고대 글자들(한자가 문자로 도입되기 전의 글자들)을 통칭하여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한자(韓字), 환자(桓字), 배달문자, 동방문자, 고한글…. 많은 시도가 있다.
한자/환자(韓字/桓字)가 쉽게 다가오는 표현이지만, 한자(漢字)와 발음이 같아 매번 구별하기가 매우 번거롭다.

하여 환글(桓契)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본다.
환글이라는 표현을 아무도 쓰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글 대신 문자에 사로잡힌 탓으로 보인다.

환(桓)은 한(韓)의 정자이다.
환인(桓因, 구석기시대로 한말/韓語의 발전기), 환웅(桓雄, 신석기 시대로 진서/뜻글자의 발전기), 환검(桓儉, 청동기/철기시대로 독자적인 뜻글자와 소리글자가 사용되던 시기) 3시기에 사용되던 모든 글을 환글(桓契)이라 이름 붙여 본다.

->글_1.3환글,한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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